본문 바로가기
* 소박한 시애틀 삶/산 이야기

야생의 숲에 내민 작은 도전

by 산꾼 A 2020. 2. 21.

비상대피소

야생의 숲에 내민 작은 도전

몇 년 전에 눈길 산행을 할 때였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산 아래로 내려가려니 벼랑 수준의 급경사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고 왔던 길로 돌아가자니 너무 늦어져 눈밭 위에서 비박을 해야 될 처지였습니다. 옆에 쌓인 눈의 단면을 보니 먼저 온 눈의 표면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 얼음층이 있고, 그 위에 새로 온 눈이 1 미터 넘게 쌓여있습니다. 급경사 지역에 이렇게 눈이 쌓이면 언제 눈사태가 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눈 위에 누워 미끄럼을 타고 급경사를 내려왔습니다. 무모한 일이었지만 운이 좋아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니 야간산행을 해서라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 같습니다. 야간산행도 위험하긴 하지만 눈 위에는 선명하게 발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며 내가 지금 제대로 가는지 확신을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짙은 안개가 껴서 시야가 나쁜데 이정표 없는 갈림길이 많던가, 등산로가 흔적도 보이지 않는 눈길 산행에서 발자국이 없던가, 눈폭풍이 불어 몹시 춥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되돌아 내려갈까'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어차피 야생의 숲에 내민 작은 도전입니다. 용기를 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산염소들의 아침
엄마곰과 아기곰

야생동물들과 공존

야생의 숲의 주인은 야생동물이고, 저는 야생동물의 터전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산행을 하며 야생동물들과 수시로 만나게 됩니다. 가끔 곰을 만나면 아직도 긴장이 되기는 하지만 두렵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서 있으면 곰이 자리를 피해 주더군요. 독수리 사진을 찍겠다고 독수리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습니다. 서 있는 곳에서 사진에 잡히면 다행이고 사진을 못 찍어도 다음에 또 만날 것입니다.

 

이곳 야생동물들과 함께 지내보니 야생동물들도 제가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별로 경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가급적 그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야생동물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는 모습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갈까 지도를 꺼내보지만 지도에도 갈림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뒤돌아 가기는 그렇고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있는 길을 선택합니다. 물론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전화신호라도 잡히면 좋겠지만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야생의 숲 속에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여기는 평범한 관광지는 전혀 아니고 등산로도 번듯하게 개발된 곳이 아닙니다. 편의시설은 거의 없고, 접근하기 매우 불편한 곳도 있고, 등산로 입구 주차장이라 하기 민망한 곳이 대부분이고, 좁은 길 옆에 주차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 좁은 길 옆에 주차를 하거나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피하려다가 앞, 뒤 두 바퀴가 급경사 계곡 쪽으로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차들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듯한 엄청 황당한 일이지만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비포장 산악도로를 10 마일 (16 Km)쯤 운전하여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하더군요. 그 불편함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여기는 자연에 가급적 손대지 않는 곳이라서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반나절 동안 산에서 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신경 쓰이지만 이것도 야생의 숲에서 겪는 일입니다.

손 타지 않은 자연이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더 위험하고, 불편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이것이 매력인가 야생의 숲에 빠져듭니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갈까 두리번거리고 야생의 숲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미국에서 지난 20년을 살아온 모습 같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지만 작은 도전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댓글